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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이남석 목사님은 지금 목회학박사의 마지막 세미나를 위해 Kentucky에 소재한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 와있습니다. 지금이 수요일 아침인데 새벽에 눈을 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다 우리 교우님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과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라는 말은 아무리 작아 보이는 것이라도 그의 중요성을 말하는 속담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사역은 이것과 너무 흡사합니다. 즉, 온 천하를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일이 나라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중요성이라는 간단한 기록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정확한 기억이기를 바라며 적습니다. 1776년 미국의 국어를 결정할 때, 한 표가 독일어 대신에 영어가 되도록 했구요, 1845년 한 표가 대통령 Andrew Johnson을 탄핵의 위기에서 구했습니다. 1923년 한 표가 나찌당의 권력을 제 2차 세계대전의 장본인인 아돌프 히틀러에게 주었습니다. 한 사람의 한 표로 인하여 세워진 세계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이 세계를 구성하는 한 조각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한 조각의 가치는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힘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복음 사역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님이 빵을 만드시는 것을 봤습니다. 널찍한 함지박에 약간의 밀가루를 넣고 물을 조금 붓고 반죽을 합니다. 또 약간의 소금과 달달하게 하는 사카린이라 불리우던 설탕가루를 뿌리고는 계속 반죽을 합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조그만 병에서 무언가 하얀 가루를 한 숟가락 떠서 넣고는 몇 번을 더 주무르시고는 삼베 천으로 덮고 따뜻한 아랫목에 이불을 씌어 놓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보니 그 넓은 함지박에 밀가루가 하나 가득 부풀어 있는 모습을 봤습니다. 한 숟갈의 적은 누룩이지만 이 적은 누룩의 역할로 밀가루 반죽 전체가 변화된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일어나 마태복음을 읽었는데 13장 33절의 말씀이 그렇게 눈에 들어와 묵상을 하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이것은 아주 짧은 메시지지만 우리 모두에게 누룩과 같은 천국의 혁명가가 되라는 엄청난 Power가 담긴 혁명적인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로럴의 가족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이 시대와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주님의 혁명군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승리의 그날을 바라보며 오늘도 믿음으로 정진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지난 주일 오후 우리교회 청년들과 이곳 Maryland 지역의 연합 청년들과의 Softball Game이 있었습니다. 오후 5:30부터 모이기 시작하여 6시가 조금 넘은 후에 Game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계획은 5회까지만 하기로 했는데 너무 재미 있어서 7회까지 하게되었습니다. 양팀의 선수들 서로 자기 Team의 승리를 위해 비장한 각오로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각 팀을 응원하는 친구들도 목청껏 자기 팀을 위해 응원했습니다. 그런데 4회를 지나면서 부터는 두 팀이 하나가 된 양 서로을 위해 응원해 주는 것입니다. 선수들이 잘 했을 때는 팀을 떠나 박수를 쳐주고 실수를 하였을 때는 더 잘할 수 있다는 격려의 응원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Softball이라는 Game을 통하여 천국의 그림자를 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1시간 30분 이상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교회에 돌아오니, 우리교회의 몇몇 집사님들이 아주 맛있는 저녁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 누가 강요하거나 부탁한 것이 아니지만 젊은이들을 위해 스스로 자원하여 사랑의 만찬을 푸짐하게 차려 주셨습니다. 특히 Grill에서 고기와 함께 볶아낸 '김치 볶음'은 최고의 명품이었습니다. 또한 가족의 결혼 관계로 멀리 여행을 떠났던 어느 집사님은 그곳에서 돌아오자 마자 차에서 짐도 내리기 전에 교회부터 둘러보며 사랑을 나눴습니다. 이러한 사랑과 섬겨주심에 저희들은 마냥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아름다운 당신'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즐겨 애독하는 하나님 말씀에 이런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2절에서부터 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 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 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지난 주일 함께 Game을 하였던 친구들이나 그들을 위해 섬겨주기를 기쁨으로 한 모든 분들의 마음이 바로 이 말씀에 나오는 "남을 낫게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당신은 '아름다운 당신'입니다. 이런 복음성가의 가사를 달아봅니다. "아름다운 마음들이 모여서 주의 은혜나누며 예수님을 따라 사랑해야지 우리 서로 사랑해, 하나님이 가르쳐준 한 가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버리고 우리 서로 사랑해" 또 다른 복음성가입니다. "당신의 그 섬김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헌신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주님이 기억하시면 족하리 예수님 사랑으로 가득한 모습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전도사님, 호랑이 두 마리가 전도사님을 잡아 먹으려고 뛰어 온다 생각 마시고 황소 두 마리리가 어슬렁 거리며 따라온다고 생각하며 말씀하세요." 저의 신학교 초창기 시절 저희와 가깝게 지내던 집사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신학교 초창기 시절 섬기던 교회에서 금요예배를 맡아 인도했습니다. 가슴의 뜨거움이 머리의 냉정함을 앞서던 시절이라 그런지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 서게되면 제 자신도 control 할 수 없는 열기에 휩싸여 보통때도 빠르게 말하는 저의 습관을 넘어서 무척 말이 빨라만 졌습니다. 그래서 그 집사님이 저의 설교 말씀을 제대로 알아 들을 수 없다며 이런 권면의 말을 제안한 것입니다. 호랑이가 아닌 황소 두 마리가 어슬렁 거리며 따라 온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설교 노트를 보면 비어있는 옆 공간에 빨란 볼펜으로 "천천히-황소 두 마리"를 크게 적어 놓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시작된 말씀을 전할 때 천천히 또박또박 전하고자 하는 제 자신과의 전쟁이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지난 번 칼럼에서 설교 클리닉에 참가하여 명설교가 몇 분들의 설교 동영상을 보면서 찾아낸 저에게 없는 공통분모가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그분들의 설교를 들으니 모두 다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느끼면서 제 자신에게 다시 한번 부탁을 하였습니다. '강대상에 올라가면 눈에 보이는 성도님들을 무조건 황소로 생각하라. 그리고는 천천히 말씀을 전하라.' 저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지만 아직 많은 부분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부족한 부분을 위해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습관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제 자신을 통하여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몸에 배인 습관 참 고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그런데 이것을 긍정적으로 바꾸어 생각한다면 이럴껐입니다. 나에게 주님을 향한 좋은 믿음의 습관, 모이기에 힘쓰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복음을 나누는 전도생활과 같은 좋은 믿음의 습관이 생긴다면, 가슴의 뜨거운 열정 만큼 좋은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 좋은 믿음의 좋은 습관 만들기에 힘써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 1박 2일로 설교 클리닉을 다녀왔습니다. 목사에게 있어서 설교는 가장 성스로운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분의 백성들에게 전하는 것 만큼 고귀한 사명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어떤 분은 이런 농담까지 했습니다. "목사에게서 설교를 빼앗는다면 목사는 목사가 아니라 먹사가 된다." 먹사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하게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목사보다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만큼 설교는 고귀한 사명이며 영광스런 사명입니다. 그런데요 목사에게 있는 이런 영광스런 사명이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움과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설교는 인간의 생각이나 인간의 논리나 인간의 계획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나의 욕심을 이루고자 설교를 빙자한 나의 계획을 전하면 안됩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하는 사역이기에 이 설교 사역은 늘 저로 하여금 긴장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설교에 대한 세미나가 있다면 저도 가능하면 많이 참석하고자 합니다. 아무튼 이번 설교 클리닉을 통하여 저는 새로운 도전을 받았습니다. 즉, 청중의 눈높이로 내려가서 청중이 쉽에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설교 내용이 좋고 꼭 필요한 말씀이라 할 지라도,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청중의 관심 밖에서 하늘 높이 떠가는 뜬 구름이 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단비가 청중에게 내려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번 설교 클리닉에서 현재 명설교가로 알려진 세분 목사님의 설교를 경청했습니다. 정말 명설교가라는 명칭에 손색이 없는 분들이며 설교였습니다. 세분의 스타일이 다 달랐지만 또한 공통분모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갖고 있는 공통분모가 저에게 없는 것이기에 저는 더 많은 도전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분들이 갖고 있는 이 공통분모를 저도 갖기 위해 많은 연습과 노력을 해야 겠습니다. 무엇인지 궁금하시지요? 그 답은 다음 번 칼럼에 쓰겠습니다.
화요일 저녁 7:30분에 우리교회 청장년부 성경공부가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 저녁 성경공부를 위해 교회로 가는 도중 제 아내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7시가 다됐는데 올라가는 길은 텅 비었는데 아직도 내려오는 길에 차들이 많네요." 우리 집에서 교회쪽으로 가는 길에는 자동차가 별로 있지 않았지만, 교회쪽에서 우리 집쪽으로 가는 길에는 차의 운직임이 정지될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래서 Traffic이 많다는 소리로 그냥 듣고 흘려 버릴 수 있었는데 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려오는 길이라니 어디가 내려오는 길이고, 어디가 올라가는 길이요? 내 생각에는 저 길이 내려오는 길이 아니라 올라가는 길인것 같은데." 그러자 제 아내가 대답하기를 "미국의 수도인 Washington DC에서 오는 길이니 내려오는 길이지요. 우리가 흔히 말하기를 서울에 올라간다고 하지 않아요? 그러니 미국의 서울인 Washington DC에서 오는 길이니 내려오는 길이지요."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가 반박하기를 "지구를 보게되면 북쪽이 항상 위에 있습니다. 그러니 남쪽에서 북쪽으로, 우리 집이 Washington DC 보다 조금 북쪽에 있습니다, 오는 저 길이 올라오는 길입니다." 저는 올라오는 길이다. 제 아내는 내려오는 길이다 하며 이렇게 교회에 가는 15분 동안을 실강이를 벌이며 갔습니다. 정말 웃기지도 않는 사건입니다. 그죠? 여러분도 혹시 이런 실강이를 벌린적이 있나요? 혹시 있다면 왜 일까요? 각자가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일거라 생각합니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으면 상대방이 보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오직 내가 보는 것만 바라보며 자기의 주장을 내세웁니다.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러사람들이 함께하기 때문에 서로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수 있습니다. 생각이 다르고 삶의 철학이 다르고 믿음의 방법도 다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모였지만 때때로 원치 않는 균열을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이럴때 이 다름을 하나로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언젠가 제 아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이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고 예수님이 뜻하시는 바에 순종한다면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 분열이 있을 수 있을 수 있을까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6-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