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드러내는 삶

 

본문말씀: 요한복음 1244 ~ 50

2010 8 25일 로럴침례교회 수요예배 설교말씀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고사 성어를 변경시킨, “엽기 고사성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 서로 상반된 말을 한다는 ‘동문서답’이라는 고사 성어를 요즘은 이렇게 엽기적으로 쓴다 합니다. “동쪽 문을 닫으니 서쪽이 답답하다.

 

이와 비슷한 것 몇 가지만, 긴장과 스트레스를 푸는 우수개 소리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많은 닭의 무리 속의 한 마리 학과 같이, 여러 평범한 사람들 속에 유독 뛰어난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 ‘군계일학’이라는 말을 요즘은 이렇게 쓴다합니다. ‘군대에서는 계급이 일단 학력보다 우선한다.

또 ‘박학다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원래 뜻은 ‘학식이 넓고 많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이렇게 엽기적으로 사용합니다. ‘아는 것은 없고 먹는 것만 탐한다.

여러분은 ‘희로애락’이라는 말을 잘 아실 것입니다.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등인, 인간의 감성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어떻게 엽기적으로 사용하는지 아세요? ‘희한하게 놀다보니 애가 탄다.

마지막으로 ‘새옹지마’입니다. 인간의 길흉화복은 바뀌기 마련임으로, 미리 해아릴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 오늘의 화가 내일의 복이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말을, 이렇게 우수개 소리로 만들었습니다. ‘새처럼 옹졸하게 지껄이지 마라.

 

이런 유머의 특징은 예로부터 전래하는 단어를, 본래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유머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에 당신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는데, 우리의 잘못으로 세상에 보내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되어 전달되는 경우가 제법 많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믿음의 백성인 우리를 통해, 이 세상에 보이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분의 사랑이 잘못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니 아예 하나님의 사랑은 전해지지 않고, 오히려 사랑을 전하는 메신저가 모든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사랑에 빚진 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눠야 하는데, 자기 자신의 의를, 사랑으로 포장하여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대 교인들의 잘못된 삶과는 정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44절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다.45절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49절입니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이 말씀 속에 숨어 있는 깊은 뜻이 무엇입니까? 당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색깔을 감추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철저하게,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만을 계시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에 모든 초점을 맞추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33년 동안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시려 하였고, 또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때로는 자기의 감정도 접으셨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도 피하셨습니다. 또한 당신께서 행하신 놀라운 능력도,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대표적인 기적과 이적인, 오병이어의 사건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보게 되면, 이 사실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전지전능하십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역사를 이루게 하신 성부 하나님께 먼저 기도하고는, 이런 기적과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처럼, 힘써 자신을 절제하셨을까요? 하나님을 계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르게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의 중보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힘쓰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씻어야 하고, 하나님의 진실을 최대한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죄인인 사람들이, 하나님을 직접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중요한 사명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제자 빌립이 예수님께 요청했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이러한 요청에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당신의 삶을 통해, 성부 하나님을 열어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진정한 경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드린다면,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가가셔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며, 사랑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셨습니다. 병든 자, 장애인, 귀신 들린 자들을 만나 고쳐주시고, 심령이 상한 자의 마음을 회복시키심으로, 능력의 하나님을 당신의 백성에게 보이셨습니다.

종교를 빙자하여, 자신들의 잇속만을 챙기고, 힘없는 백성들을 짓누르던,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을 책망하시며,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보이셨습니다.

만백성의 죄를 대속하신 십자가의 사건과, 죽은 지 삼 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종말에 있게 될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들로 하여금 알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을 나타내는데 모든 것을 쏟아 부으신 삶입니다.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여주시고자 애쓰신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깊이 알아갈 수 있으며,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더 깊은 사랑의 관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함을 얻고, 주님의 제자가 된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 구원의 주인이시며, 우리 삶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성품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 분인지, 얼마나 많은 긍휼과 자비로 참으시며, 죄악된 이 세상이 변화되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지, 당신의 뺨을 때리고, 침을 밷고 조롱한 백성들을 긍휼이 여기시며, 오히려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신 분이심을 알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과 신실한 삶을 통해서, 저들에게 예수님을 알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잘 압니다. 성경을 통해 혹은 우리의 믿음의 눈을 통해, 그리고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 잘 압니다. 그런데 세상은 예수님을 알 길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우이독경이 되고, 기사와 이적의 역사가 나타나도, 그저 하나의 우연적인 사건으로 바라보며, 성령님의 touch가 있어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갑니다.

 

이렇게 영혼이 둔화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게 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바로 여러분과 저의 삶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웃음으로 대할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것을 이해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였지만, 묵묵히 기도하며 인내할 때, 사람들은 우리의 그러한 모습에서 예수란 분이 바로 저런 분이었구나 하며, 예수님을 향한 비난을 멈추고, 예수님께 고개를 숙일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보면서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이며, 그리고는 예수님이 정말로 의로운 분이었음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향하여 말하기를, “너는 그리스도의 향기라” 말하며, “너는 그리스도의 편지라”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말을 앞세우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과 행동의 일치를 보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사람들은, 우리의 말을 통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알게 되고, 우리의 삶을 보면서 예수님을 보게 되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중대한 사명이 여러분과 저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말로는 쉽게 할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이에 대하여 어떤 분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태양은 강렬한 빛을 발하는 발광체이다. 빛만 발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뜨겁게 불타며, 엄청난 열을 뿜고 있다. 그래서 사람이 접근할 수 없다. 그러나 달은, 스스로 뜨겁게 불타는 발광체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주선을 타고 가서, 달의 표면에 착륙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달은 한밤중에 빛을 발 한다. 태양만큼 밝지는 않아도, 보름 때는 제법 밝게 빛나기도 한다. 그래서 그 환한 달빛에, 사람의 얼굴을 알아볼 뿐만 아니라, 옛날에는 책을 읽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그렇다면, 이 달의 빛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 빛은, 태양의 빛을 받아 반사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안에 의를 행할 능력이 없다고 실망하지 마시지 바랍니다.

예수님을 나타내는 삶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완벽한 성품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의롭게 살 수 있는 선한 것도 없습니다. 의지도 약하고 사랑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불이 전혀 없는 저 달도, 환하게 세상을 비추지 않습니까? 해의 빛을 받아 반사하면 저렇게 밝을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없으나, 빛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빛을 받아 반사하는 삶을 살면, 얼마든지 아름답게 빛날 수 있습니다.  어두운 세상을 밝힐 수 있습니다. 방황하며 혼돈 하는 세상에, 진리이시며 구원이신 예수님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달빛은 늘 밝게 빛나지 않습니다.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지면, 반달도 되었다가 초승달이 되기도 하고, 아주 가려져서 전혀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지구가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지구가 해를 가릴 때 달이 깜깜해지는 것처럼,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나의 생각과 욕심으로 채워 질 때,

우리를 통하여 반사되는 예수님의 빛이 가리워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욕심이, 내 안에 빛나는 예수님을 가리우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이기심과 허영심이, 정욕과 시기심이, 예수님을 가리우지 못하게만 한다면,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의 빛이 우리의 얼굴을 통해 우리의 삶을 통해 늘 환하게 빛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이 세상에 예수님을 나타내야할 소명이 있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이 거룩한 소명을 위해 자신을 죽이고 주님의 빛을 발하시기를,

그리하여 예수님을 나타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